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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 한의학은 없다” 서문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원하고 계신 김동영선배가 쓴 “이땅에 한의학은 없다” 서문입니다.

|책|머|리|에|

한의학이 이룩한 성과로서 한의학계는 허준의 『동의보감』과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꼽는다. 그러나 단언하거니와, 이 두 가지야말로 한의학의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와 현실을 보여주는 지표에 다름 아니다.

우선 『동의보감』은 그 어느 곳에도 허준의 독창적인 의견이나 처방이나 사상이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16세기 이전의 중국 의학서적을 짜깁기한 책이다. 따라서 그 짜깁기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16세기 중국 의학을 넘어설 수는 없다. 중국 의학은 그 이후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왔다. 결국 이러한 『동의보감』을 소위 ‘동의학’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의 한의학이 중국 의학에 500년이나 뒤진 상태라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다.

필자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한국 한의학계의 『동의보감』 평가에 동의한다. 실제로 한국 한의학은 『동의보감』의 수준을 넘어서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한의학은 지금도 이 『동의보감』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16세기 중국 의학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동의보감』을 동의학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 이 땅에 진정한 의미의 한의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참으로 당돌하게 이 땅에 한의학은 없다고 하는 것은 독단적 판단이 아니요 결국은 한국 한의학계의 집단적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내면의 외침이다. 필자는 이 처절한 비명 앞에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상체질의학은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은 사실상 사상체질의학의 경전이다.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은 전반부에서 홀로 깨달은 우주의 도와 인체의 도를 서술하고, 중후반부에서는 사상체질의학이라고 알려진 의학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전반부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홀로 깨달은 도에 대해서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반 이후에 전개하고 있는 의학이론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주로 정통 동양의학 이론에 의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 논리 전개의 기준 틀로 삼고 있는 동양의학 이론의 이해 수준이 차라리 코미디라고 해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동의보감』은 중국의 의서들을 그대로 짜깁기하였기에 비록 대단한 의학서적은 아닐지라도 그 폐해가 덜하다. 정통 동양의학이 특별한 검증 없이 전세계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장구한 기간에 걸쳐 수많은 환자들을 통하여 임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정통 동양의학의 의학적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가설 체계이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패러다임과 가설이 아무 검증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다. 새로운 가설이나 약물을 철저히 검증하지 않고 바로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으로 인정하는 위험하고도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는 나라가 세계 어느 곳에 있을까? 사상의학을 맹신하는 일부 한의사들은 임상에서 그 신묘한 효과를 보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당당하게 엄격한 검증에 응하여야 할 것이다.

사상의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가설이다. 따라서 필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장 국가는 이 위험한 가설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완벽한 검증이 마무리되어 그 타당성이 입증될 때까지는 법률적으로 금지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환자에게 사상의학에 의한 처방이라는 것을 반드시 사전에 고지하도록 의무화할 것을 주장한다.

사상의학에 대한 검증절차는 우선 통계적으로 일반인과 한의사들 중에서 유의미한 샘플 집단을 만들어 한의사들의 체질 판별이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수치를 보이는가를 판단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검증에 나서는 한의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여러 한의사가 동일한 사람에 대하여 동일한 체질 판별을 할 수 있을까? 한의사 자신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체질 판별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그럴 리도 없겠지만) 그것을 의학이론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체질 판별이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는 수준이라면 사상의학은 즉시 법으로 완전히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만일 체질 판별이 통계적으로 의미 있다는 결과가 나오면 임상에서 그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 사상의학에 따라 처방하여 치료한 효과가 플라시보 효과(위약 효과)를 넘어서는지를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부작용이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해보아야 한다. 의학으로 인정할 만한 안정성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국민의 생명을 걱정하고 보호할 생각이 있는 국가라면 최소한 이 정도 검증은 거치고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 500년을 지배한 사대부들은 의사를 천시했다. 학문이 높은 자는 비록 서자라 하여도 의학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학 연구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허준인들 무슨 수가 있었을까. 우주의 도를 단숨에 깨우칠 만한 천재라 할지라도 동양의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경종임금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아우이자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왕세제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경종에게 인삼차를 올리려 했다. 당시의 어의는 자신이 처방한 약과 인삼은 상극이라며 말렸지만 연잉군은 어의를 꾸짖으며 인삼을 연달아 세 차례나 올렸다. 그런데 그 직후 경종이 급사하자, 연잉군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역사적 진실이야 알 도리가 없지만 연잉군이 의도적으로 경종을 해칠 뜻이 아니었다면, 이 일화를 통해 그 당시 어의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의의 의학적 소견을 묵살해버릴 정도로 당시 지배층은 의사들의 실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동의보감』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조선 최고의 명의였다던 허준도 이런 수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고자 해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조정에서 『동의보감』을 편찬한 목적도 그것으로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증세별로 잘 정리한 처방백과사전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고 비치토록 하여 누구든 글 좀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간단하게 이 책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물론 질병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발상이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동의보감』으로 의학의 이치를 궁구하여 의사를 양성하거나 제대로 된 의학을 세워보자는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조선 말고 어느 나라가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을 그렇게 천시하고 홀대하였을까. 당시의 지식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학문의 경지가 높으면 무엇하겠는가. 그들은 자신과 가문의 영달만을 추구하였을 뿐 국민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허준, 이제마는 물론이요 현재의 한의사들도, 제대로 된 의학적 치료를 한번도 받지 못하는 국민들도 모두 불행한 역사와 제도의 희생양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조선 500년은 그렇다 치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현재, 그리고 미래 아니겠는가.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긴다면 그런 이에게 미래는 없다.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할 때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자, 우리는 이제 우리 한의학의 빈곤한 역사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미리 밝혀두지만, 없었던 것을 있었던 것처럼, 몰랐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눈가림하지는 말자는 것이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현재 중학생인 내 아이가 커서 아빠처럼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현재의 상황이라면 제대로 동양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공부를 하면 부모형제와 고국산천을 등지고 외국으로 나돌 수밖에 없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필자 역시 그런 이유로 고국 땅을 떠나, 마지막 가시는 아버님조차 뵙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다.

한국에서 공부하면 어설픈 면허증은 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동양의학을 배울 수는 없다. 필자에게서 『황제내경』 강의를 듣던 한국의 한의대 학생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다. 그 대학의 교수가 말하기를 한의학 시장이 개방되면 한의사들은 칼국수 장사나 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학생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 말이 맞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해줄 수가 있었겠는가? 한국 한의학계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 교수의 말이 한의학이 개방되면 너희들이 굶어죽게 되니 죽기 살기로 그 개방을 막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굶어죽을 수도 있으니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필자가 사랑하는 고국 땅에서 환자들의 아픔을 치료하고 후학들과 함께 진정한 의학을 고민할 수 있는 허가받은 한의사인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문제는 지금 한의학을 한창 공부하고 있거나 앞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 아니겠는가. 그들로 하여금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생명을 다루는 의학을 함에 있어 어디서 배우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내 나라 실력이 부족하면 다른 나라에 가서라도 배워오는 것이 당연하다. 미국이 밉다 해서 우리보다 훌륭한 점이 있는데도 미국에서는 배워오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일본이 미우면 바둑도 일본에서 배워오면 안 되는 것인가? 학문을 함에 있어 어설픈 민족감정이 왜 동원되는가?

동양의학은 임상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 깊은 가치를 깨닫게 된다. 서양의학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의학을 인류가 누리게 된 것 자체가 축복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내가 시종일관 ‘동양의학’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중국 의학이라는 의미의 漢醫學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고, 또 내세울 것도 없는 상태에서 韓醫學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낯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의학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여 인류에 기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동양의학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바둑이 일본에서 배워 일본과 중국을 넘어선 것처럼 의학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실력으로 당당하게 중국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훗날 중국 사람들이 서슴없이 한국의 동양의학이 중국을 넘어섰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싶다. 그런데 최근 한국 한의학계에서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만주 벌판을 달리던 우리 민족의 기개는 어디로 가고 어쩌다 이런 낯부끄러운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지 너무나 답답할 뿐이다. 중국 의학을 부분부분 그저 옮겨 적었을 뿐 의학적으로 재해석한 것도 아닌 『동의보감』을 막상 인류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데 성공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중국 의학계가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다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개인이나 집단이나 민족이나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남에게 줄 것이 없으면 참으로 비참하다. 나는 우리 민족이 남으로부터 무엇을 받을까 생각하기보다 인류에 무엇인가 줄 수 있기를 고민하는 활달하고 기개 있고 당당한 민족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의학은 문화의 총체적인 결과로서 우리가 당장 서양의학을 넘어서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동양의학은 열심히 하면 중국을 넘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 특별한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설비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필자 같은 못난 사람도 세계적으로 치료한 예가 없는 중증 척추측만증을 치료할 수 있을 정도니 총명한 후학들이 열심히 하면 그 얼마나 훌륭한 의학이 되겠는가. 인류에 기여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그 부가가치가 엄청날 것이다. 결코 비관하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중국 의학을 넘어설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시종 정당해야 한다. 필자도 비록 보잘것없는 역량이지만 힘을 다할 생각이다. 이 책도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받아주었으면 한다.

의학 연구의 전통이 전무한 토양에서 백성들의 건강을 위하여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력했을 허준과 이제마를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한의학계가 그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그들 잘못이 아니다. 또한, 곳곳에서 노력하고 있을 현재의 한의사들도 생각한다. 함께 잘못된 역사 인식과 제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그마한 희망의 싹을 보여주고 있는 젊은 한의사들과 한의대생들에게 마음속의 격려를 아낌없이 보내며 패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당부한다. 지금 우리의 판단과 결정이 미래 민족의학의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임을 인식하고,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 가지려고 하는 자는 다 잃고 만다는 역사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면 바른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고 지금도 지하에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선조들께 바친다. 이분들의 영적인 인도가 없었다면 이 책은 결코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2006년 겨울, 밴쿠버에서

김동영

김동영원장의 글을 더 읽으실 분은 달빛한의원 사이트로 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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