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황제(黃帝)가 『내경(內經)』 총 18권을 창작하였는데, 그중 『영추(靈樞)』 9권, 『소문(素問)』 9권이 바로 그 총수이다. 그러나 세상에 준행되고 유전되는 것은 오직 『소문』뿐이다. 진월인(秦越人)이 그중 10분의 1, 2를 취하여 『난경(難經)』으로 발휘하였고, 황보밀(皇甫謐)이 다시 편찬하고 배열하여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으로 삼았다. 각가의 학설은 모두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중에는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어, 후세의 준칙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남양활인서(南陽活人書)』에서 말하기를 “해역(咳逆)은 바로 얼증(哕證)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신중하게 『영추』 경을 고찰해보니, 그중에서 말하기를 “방금 섭취한 오곡(五穀)의 기가 위(胃) 안으로 들어가, 위 안에 원래 있던 한기(寒氣)와 상쟁(相爭)하므로, 얼증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열거하여 이곳에 나란히 놓아보면, 어느 것이 이치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또 예를 들어 『난경』의 제56편은 진월인이 『영추·본수(本輸)』 편의 내용 대요를 표시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유주(流注)를 논한 것이라고 여긴다. 내가 신중하게 『영추』 경을 고찰해보니, 그중에서 말하기를 “이른바 절(節)이란 신기(神氣)가 운행하며 출입하는 곳이지, 피육근골(皮肉筋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기란 바로 정기(正氣)이다. 신기가 운행하며 출입하는 것이 유주이다. 정(井), 형(滎), 수(輸), 경(經), 합(合)은 경맥 수주(輸注)의 관건이 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열거하여 이곳에 나란히 놓아보면, 말하는 도리가 천양지차일 뿐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영추』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어, 세상 사람들이 명확하게 탐구하지 못할 뿐이다.
의사로 행세하며 병을 치료함에 있어, 관건은 의서(醫書)를 연독(硏讀)하는 데 있다. 의서를 읽고도 양의(良醫)가 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은 있으나, 의서를 읽지 않고서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 자는 없다. 의서를 연독하지도 않고 또 대대로 의학을 가업으로 삼은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사람을 해치는 것은 칼이나 창이나 몽둥이보다 훨씬 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남의 자식으로서 의서를 읽지 않으면 아직 효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본래 평범하고 우매(庸昧)하나, 어릴 때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의도(醫道)를 잠심(潛心)하여 연구하여, 그중의 도리를 비교적 깊이 탐구하였다. 이에 우루(愚陋)함을 헤아리지 않고, 각종 서적을 참고하고 대조하였으며, 다시 집에 소장하고 있던 구본(舊本) 『영추』 9권, 도합 81편을 교정하고, 주음(注音)과 석사(釋詞)를 증보하고 수정하여 권말에 덧붙여 24권으로 각인(刻印)하였다. 혹여 생명을 애호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권(書卷)을 펼치면 아주 쉽게 명백히 알아, 착오가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상황을 진술하여 소속 부문에 설명한 것 외에도, 부(府)의 지휘관에게 조례에 의거하여 전운사(轉運司)에 신청하여, 관리로 하여금 상세히 심정(審定)하게 지정하고, 전부 또렷하게 등사(謄寫)하여 비서성(秘書省)과 국자감(國子監)에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현재 나는 또 전문적으로 명의(名醫)를 방문하고 초빙하여, 진일보하여 그들에게 신중하고 상세하게 참정(參訂)해주기를 청하였으니, 이로써 이후의 독자를 그르침을 면하고, 후세에 무궁한 이익을 가져다주어 의학의 공효가 연원하는 바가 있도록 하였다.
때는 송(宋) 소흥(紹興) 25년 5월 15일 금관(錦官) 사숭(史崧) 제(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