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보주황제내경소문(重廣補注黃帝內經素問) 서문2

『중광보주황제내경소문(重廣補注黃帝內經素問)』 서문(제2서)

이 글은 송나라의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 신하들이 올린 서문으로, 의학이 단순히 병을 고치는 기술을 넘어 통치자가 백성을 사랑하는 ‘인(仁)’의 실천임을 강조합니다. 황제(黃帝)와 기백(岐伯)이 문답을 통해 의학을 창시한 이래, 진화(秦和), 월인(편작), 창공, 장중경, 황보밀, 양상선, 전원기 등으로 이어지는 전승 과정을 서술합니다. 특히 당나라 왕빙이 스승의 비본을 얻어 결실된 제7권을 보완하고 주석을 단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의학이 유학자(사대부)들에게 외면받고 기능인들의 손에만 맡겨져 오류가 많았던 현실을 개탄합니다. 이에 송 인종(仁宗)의 명으로 수많은 판본을 수집하여 6천여 자를 바로잡고 2천여 조의 주석을 더하여, 의학을 다시 부흥시키고 백성을 장수의 길로 이끌고자 했던 교정 작업의 전말과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통치자의 인(仁)과 의학의 기원

신들이 듣건대,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생존해 있을 때 멸망을 잊지 않는 것은 지난 성인(聖人)들이 우선으로 힘쓰던 바였고, 백성의 병고를 살피고 백성의 숨겨진 아픔을 구휼하는 것은 주상(임금)의 깊은 어지심입니다.

옛날 황제(黃帝)께서 제위에 계실 때, 몸을 다스리고 남은 힘으로 천하를 다스리셨습니다. 명당(明堂)에 앉아 팔방의 끝(八極)을 굽어살피시고 오행의 법칙(五常)을 고찰하여 세우셨습니다. 이르시기를 “사람의 생명은 음을 등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負陰而抱陽), 맛을 먹고 색을 입지만, 밖으로는 추위와 더위의 요동침이 있고 안으로는 기쁨과 노여움이 교차하여 침범하니, 요절하거나 정신이 혼미하거나 전염병에 걸리는 일이 국가에 대대로 있어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때에 맞춰 오복(五福)을 거두어 뭇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자 하여, 마침내 기백(岐伯)과 더불어 위로는 천기(天紀)를 끝까지 탐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다하였으며, 멀리는 사물에서 이치를 취하고 가까이는 몸에서 이치를 취하여, 서로 묻고 논난(論難)하여 법도를 드리워 만세토록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에 뇌공(雷公) 같은 무리가 업을 전수받아 전하니 『내경(內經)』이 지어졌습니다.

의학 경전의 전승과 손실

역대로 이를 보배로 여겨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창주(동주)가 흥할 때 진화(秦和)가 육기(六氣)의 이론을 기술하여 『좌사(좌전)』에 상세히 밝혔습니다. 그 후 월인(편작)이 그 한두 가지를 얻어 부연하여 『난경(難經)』을 지었습니다. 서한(西漢)의 창공(倉公)은 그 옛 학문을 전하였고, 동한(東漢)의 장중경(張仲景)은 남겨진 이론을 모아 저술하였으며,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은 이를 편집하여 『갑을경(甲乙經)』을 만들었고, 수(隋)나라 양상선(楊上善)은 모아서 『태소(太素)』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전원기(全元起)라는 자가 있어 비로소 훈해(주석)를 달았으나 제7권이 빠져 있었습니다.

왕빙의 공헌과 의학의 쇠퇴에 대한 탄식

당나라 보응(寶應) 연간에 이르러 태복 왕빙(王冰)이 이를 독실하게 좋아하여 선사(스승)가 소장했던 책을 얻어 크게 순서를 매기고 주석을 다니, 마치 삼황(三皇)의 남겨진 글처럼 찬란하여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나라의 법령이 의학을 의술을 행하는 기능인(집기지류)들에게 맡기고 사대부 선생들은 드물게 말하게 하니, 성인과의 거리가 이미 멀어지고 그 학술이 어둡고 모호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문장과 주석이 어지럽게 섞이고 의리가 혼동되었습니다.

그들은 삼분(三墳)의 남은 글이 제왕의 높은 취지이자 성현의 능한 일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당요(唐堯)가 사시(四時)를 책력으로 만든 것, 우순(虞舜)이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한 것, 신우(神禹)가 육부(六府)를 닦아 제왕의 공을 일으킨 것, 문왕(文王)이 육자(六子)를 미루어 괘기(卦氣)를 서술한 것, 이윤(伊尹)이 오미(五味)를 조화시켜 임금을 이르게(치세로 이끌게) 한 것, 기자(箕子)가 오행(五行)을 펼쳐 세상을 보좌한 것과 그 이치가 하나입니다.

어찌하여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미세한 도(道)를 지극히 낮고 얕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것이 폐절되지 않게만 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까.

송나라의 교정 작업과 그 의의

최근 가우(嘉祐) 연간에, 인종(仁宗)께서 성조(성스런 조상)의 남겨진 사업이 땅에 떨어지려는 것을 염려하시어, 마침내 그 학문을 통달하여 아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바로잡게 하셨습니다. 신 등이 재주가 없으면서도 전교(典校)의 직임을 맡아 엎드려 생각한 지 십 년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중국과 밖을 널리 찾아 수많은 판본을 모으고, 점차 그 뜻을 찾아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니 열에 서너 가지는 얻었으나 나머지는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저희끼리 이르기를 밝은 조서에 보답하고 성상의 뜻에 부합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겨, 다시 한나라와 당나라의 서록(서목)에서 세상에 남아 있는 옛 의경 수십 가(家)를 채집하여 차례대로 고증하고 바로잡았습니다.

착종된 것을 관통하고, 방대함을 회통하며, 혹은 근본 뜻을 단정히 하여 지엽을 찾고, 혹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탐구하여 알 수 있는 것을 정했습니다. 옛 목차에 따라 차례를 매기니,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 6천여 자이고, 주석과 뜻을 더한 것이 2천여 조항입니다. 한 마디 말을 취하고 버림에도 반드시 상고함이 있었고, 어긋난 문장과 의심스러운 뜻이 이에 상세하고 분명해졌습니다.

이로써 몸을 다스리면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재환을 없앨 수 있고, 정사에 베풀면 생명을 무궁한 곳까지 넓힐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제(皇帝)께서 대동(大同)의 운수를 어루만지시고 끝없는 복을 안으시어, 선대(황제)의 뜻을 기술하여 받들어 이루시고 미미해진 학문을 일으켜 영원히 바로잡으시니, 온화한 기운을 부를 수 있고 재해가 생기지 않으며, 온 세상의 백성을 도야하여 다 함께 장수의 영역(수역, 壽域)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국자박사 신 고보형, 광록경 직비각 신 임억 등은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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