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이에게 ‘장서(藏書)’를 잃는 것은 자신의 연대기 일부가 도려내지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인생의 궤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두 번의 ‘분서갱유’가 있었다.
제1차 분서갱유: 청춘의 기록이 고물상으로 향하던 날
어릴 적부터 책을 모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할 무렵, 내 서재에는 대략 오천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 책들은 나의 20대와 30대를 지탱하던 사유의 근간이었다.
나이 마흔, 큰 뜻을 품고 중국 유학길에 오르며 그 소중한 분신들을 부모님 댁에 맡겼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부모님께서 이사를 하시는 과정에서, 그 오천 권의 책은 한꺼번에 고물상에 버려졌다. 타지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허망함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나의 청춘이 한낱 종이 뭉치로 취급되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제2차 분서갱유: 지하의 습기에 잠겨버린 중의학의 꿈
상실의 아픔을 뒤로하고 중국 북경중의약대학에서 다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중의학 교과서부터 각종 전문 서적까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탐독했던 지식의 결정체들이었다. 귀국 후, 당장 둘 곳이 마땅치 않아 형님의 집 지하 창고에 그 책들을 보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오른 지하실의 습기와 곰팡이는 자비가 없었다. 다시 펼쳐본 책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나의 40대, 치열했던 유학 시절의 증거들이 그렇게 또 한 번 몽땅 버려졌다. 두 번째 분서갱유였다.
다시, 불멸의 서재를 구축하며
물리적인 책은 사라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두 번의 전멸을 겪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종이는 썩고 버려질지언정, 그 문장들이 내 머릿속에 남긴 ‘결’과 내 가슴에 새긴 ‘통찰’은 누구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습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누구도 함부로 내다 버릴 수 없는 나만의 디지털 서재를 짓는다. 블로그에 기록하는 한 자 한 자는 이제 곰팡이가 슬지 않는 불멸의 기록이 될 것이다.
오천 권의 책은 사라졌지만, 그 지혜는 이제 나의 문장이 되어 세상과 다시 만나고 있다. 이것은 상실에 대한 복수이자, 기록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