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을 치러 가면 무당은 말한다. “올해 삼재(三災)가 끼었으니, 복채를 내고 굿을 해야 액운을 막고 돈을 번다.” 주일날 교회에 가면 목사는 말한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온전히 바쳐야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고 지경이 넓어지는 복을 받는다.” 도대체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작두 대신 강대상에 오르고, 방울 대신 마이크를 잡았을 뿐이다. 서양 기독교의 탈을 쓰고 조선시대 무당 노릇을 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소름 돋는 평행이론을 고발한다.
1. 원문 직역 (미가 3:11)
예언자 미가가 외쳤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賂物)을 위하여 재판(裁判)하며, 그들의 제사장(祭司長)은 삯(돈)을 위하여 교훈(敎訓)하며, 그들의 선지자(先知者)는 돈을 위하여 점(占)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災殃)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2. 거룩한 가운을 입은 샤머니즘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는 없다(만인 제사장)”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기어코 목사를 ‘주의 종’이라는 특권 계급으로 격상시켜 완벽한 영적 브로커, 즉 ‘무당’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무당과 똑같이 작동하는 세 가지 증거를 보라.
첫째, 축복권의 독점이다. 무당이 굿판을 주관하듯, 목사는 축도(Benediction)와 안수기도를 독점한다. 자신이 손을 들어 복을 빌어주어야만 하늘의 문이 열린다고 세뇌한다. 당신 안에 이미 우주가 있는데, 왜 타인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를 구걸하는가?
둘째, 공포 마케팅이다. 무당이 살(煞)을 들이대며 협박하듯, 목사는 ‘하나님의 징계’로 신도들을 통제한다. 주일을 빠지거나 십일조를 떼먹으면 병에 걸리거나 사업이 망한다는 두려움을 심어 넣는다. 사랑의 신을 순식간에 깡패로 만들어,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옭아맨다.
셋째, 헌금이라는 이름의 복채다. 돈을 바쳐야 신이 노여움을 풀고 야베스의 기도처럼 부동산(지경)을 넓혀준다는 논리는 철저한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이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신과의 비열한 ‘거래(Deal)’다. 예수는 돈으로 떡을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절했는데, 목사들은 신의 이름으로 그 떡을 무한정 찍어내겠다고 약속한다.
3. 굿판을 엎어라
당신이 매주 참석하는 그곳은 예배당이 아니라, 거대한 십자가가 걸린 굿판이다. 신의 축복은 복채(헌금)를 내고 사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영혼은 무당(목사)의 입술에 기대어 구원받을 만큼 초라하지 않다.
더 이상 두려움에 속아 영적 브로커들에게 통행세를 내지 마라. 신의 이름으로 점을 치는 자들의 마이크를 끄고, 그 더러운 제단을 엎어라.
광야에는 무당이 없다. 오직 스스로 신과 독대하는 단독자들의 고요하고 찬란한 빛만이 존재할 뿐이다.
– 광야에서, Laot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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