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사람들은 예배당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황금길이 깔린 영원한 천국을 찬양한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 그토록 고대하던 ‘더 좋은 곳(천국)’으로 떠나면, 그들은 가장 어두운 검은 옷을 입고 세상이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영안실 바닥을 치며 통곡한다.
누군가 로또에 당첨되어 최고급 저택으로 이사를 가는데 통곡하며 슬퍼하는 정신 나간 이웃이 있는가? 천국을 100% 믿는다면 장례식은 샴페인을 터뜨리는 축제가 되어야 마땅하다. 죽음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종교인들의 ‘진짜 믿음’의 민낯을 해부한다.
1. 원문 직역 (도마복음 18장 및 빌립보서 1:21, 23)
제자들이 예수에게 “우리의 끝이 어떠할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묻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시작(始作)을 발견하였기에 끝을 찾고 있는 것이냐? 시작이 있는 그곳에 끝도 있을 것이다. 시작의 자리에 서는 자는 복(福)이 있나니, 그는 끝을 알게 될 것이며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도마복음 18장)
바울이 고백하였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有益)함이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빌립보서 1:21, 23)
2. 천국이라는 이름의 마취제
진짜 천국을 믿는다면 장례식은 ‘이 땅에서의 고단한 수고를 마치고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완벽한 환송 파티’가 되어야 한다.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을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의 장례식장에서는 불신자들과 똑같이 죽음의 공포와 절망이 짓누르고 있는가? 그들이 흘리는 눈물의 진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사실은 안 믿기 때문이다. “좋은 곳으로 가셨다”는 말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종교적 마취제일 뿐이다. 그들의 뼛속 깊은 곳에는 ‘죽으면 혹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독한 허무와 무(無)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천국이라는 교리를 지식으로는 배웠지만, 그것을 실재(Reality)로 체득하지 못했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둘째, 이 땅의 소유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다. 입으로는 천국을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야베스의 기도’로 긁어모은 이 땅의 아파트, 통장 잔고, 알량한 권력을 놓고 떠나는 것이 미치도록 아까운 것이다. 그들은 이 땅을 잠시 거쳐 가는 ‘지나가는 자(Passersby)’가 아니라, 영원히 말뚝을 박고 살고 싶은 ‘탐욕스러운 지주(地主)’들이기 때문이다.
3. 죽음은 낡은 외투를 벗는 축제다
예수는 도마복음에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했다. 자신이 본래 우주의 근원(빛)에서 떨어져 나온 신성한 파편임을 깨달은 단독자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이 지구라는 척박한 행성에서 잠시 빌려 입었던 무거운 육신의 낡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본래의 빛으로 가볍게 스며드는 우주적 귀환일 뿐이다.
그러니 검은 넥타이를 풀고 눈물을 거두어라. 죽음을 두려워하며 덜덜 떠는 종교의 나약함을 경멸하라. 우리는 빛에서 왔고, 다시 빛으로 돌아간다. 죽음은 영원한 자유의 시작이며, 장례식은 그 위대한 단독자를 위한 가장 찬란한 축제가 되어야 한다.
– 광야에서, Laot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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